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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웅 칼럼

대통령 세종을 모신 장관들

기사입력 2022-10-07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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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고의 역사극작가요, 소설가인 신봉승(1933~2016)선생이 오래전(2012.11.19 중앙일보)에 ‘조선드림팀’이라 하여 가장 이상적인 대통령을 세종대왕으로 선정했습니다.
그리고 국무총리를 필두로 16명의 장관급 인사를 임명(?)했습니다.
국무총리 이원익.( 1547 명종2~ 1634 인조12), 성품이 곧고 윗사람의 신임이 두터웠습니다. 임진란때 이조판서, 평안도 도순찰사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두루 거쳤습니다. 광해군이 즉위하여 왕대비를 폐비하려 하자 반대하다가 영의정의 몸으로 귀양을 가기도 했습니다.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죽이려 하자 대비에게 간청하여 광해군의 목숨을 살리기도 한 도량이 넓은 인물입니다.
기획재정부장관 이 황.(1501 연산1~ 1570 선조3) 생후 7개월만에 아버지가 사망하여 어머니와 숙부에 의해 양육되었고 성균관 박사 단양 풍기 군수를 지냈고 대사성, 부제학, 공조참판을 임명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고 명종 말 대제학 판중추 겸 지경연을 지낸 후 도산서원에서 후학을 양성하였습니다.
교육과학기술부장관 김장생.(1548 명종3~ 1631 인조9) 율곡선생의 성리학을 통달,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고 예학파 유학의 거두로,  인조가 자기 아버지를 원종(元宗)으로 추존할 때 반대하고 관직 사퇴하였고 여러 번 벼슬길에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였습니다. 성품이 너그럽고 순박하여 덕행군자라 일컬음을 받은 분입니다.
외교통상부 장관 이동인.(1849?~1881 고종18) 승려이자 외교관, 개화사상가로 처음으로 창씨개명한 사람이며 일본명은 아사노 도진(淺野東仁)이었습니다. 신사유람단으로 파견되어 총포, 무기, 군함구입을 위해 막후교섭으로 성사시킨 인물로 한미수호조약체결에도 일조한 인물입니다.
통일부 장관 최명길.(1586 선조19- 1617 인조25) 1627 정묘호란 때 오랑캐와 화친을 주장하여 오랑캐를 물리치고 1636년 병자호란 때도 주화론을 주장하여 청태종에게 항복으로 전쟁을 종식하고 후에 우의정 영의정을 지냈습니다.
법무부 장관 최익현.(1833 순조33~ 1906 고종43) 배일파의 거두로 호조판서 역임하였고 을사늑약에 반대하고 의병을 일으켜 항전하다가 잡혀서 대마도로 귀양, 그곳에서 단식하다가 사망하였습니다.
국방부장관 조 헌.(1544 중종39~ 1592 선조5) 선조 때 의병장. 곧은 성품으로 1592년 임진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보은의 통로를 차단하고 홍성에서 의병 1000여명으로 싸우고 전주에 가서 700명 의사로 금산으로 내려가 싸우다 전멸하였습니다. 후에 영의정으로 추서되었습니다.
행정안전부장관 이 이.(1536 중종31~ 1584 선조 17) 율곡선생은 황해감사, 대사간, 대사헌, 대제학, 호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역임하였고 정치적, 부패의 타개와 백성의 구제에 대한 구체적 방책을 세웠으며 기상이 호탕하고 도량이 넓고 미래 대비에 혜안을 가진 분입니다.
문화체육부장관 박지원.(1737 영조13-1805 순조5) 청나라에 다녀와 견문을 넓혔고 경제, 정치, 군사 문학을 섭렵하고 실학사상의 거두로 선진 외국문화 섭취를 주장한 북학파의 한 분입니다.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채재공.(1720 숙종46~1798 정조23) 암행어사로 여러 지방을 다녀와 지방 사정을 잘 알고 청나라에 다녀와 타국의 사정도 정통하였으며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낸 충성스러운 신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지식경제부 장관 정약용.(1762 영조38~1861 현종2) 좌부승지, 동부승지, 병조참지 역임하였고 과학기술에 밝고 천문, 지리, 산학(算學) 등 국가경영 전반에 걸쳐 해박한 학자로 백성의 이용후생을 위한 노력과 저술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보건복지부장관 김인후.(1510 중종5~1560 명종15) 옥과현감, 홍문관, 부수찬을 지냈고 을사사화 때 고향장성으로 낙향 후 성리학 연구에 몰두 천문, 지리, 의약 연구에 몰두하여 학파를 형성하였습니다.
환경부장관 성혼.(1535 중종30~1598 선조31) 이율곡 선생의 천거로 관직에 나아가 병조참의 이조참의를 역임하였고 성리학의 대가이며 왕이 하사한 쌀을 이웃에게 나눠주며, 후학양성에 힘썼습니다.
고용노동부장관 김굉필.(1454 단종2~ 1504 연산군10) 육경연구에 몰두하여 실천궁행을 주장, 조선 5현 중 한 분입니다. 갑자사화 때 처형되었다가 후에 우의정으로 추서되었습니다.
여성가족부 장관 박세채.(1632 인조10~1695 숙종21) 당쟁중재에 힘썼습니다.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왕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길을 가라고 건의하였습니다.
국토해양부장관 홍대용.(1731 영조7~1783 정조7) 양명학의 권위자로 중국과 독일학자들과 교류, 사헌부감찰, 영주군수를 역임하고 놀고먹는 귀족이 나라와 백성을 좀먹는다며 지행합일설을 주창했습니다.
특임장관 이항복.(1556 명종11~1618 광해군10) 병조판서 5회 우의정, 영의정을 지냈으며 정적이 없이 두루 교류, 광해군때 임해군을 변호하다가 탄핵을 받았고 영창대군을 구원하다가 북청으로 뒤양가서 그곳에서 사망했습니다.
검찰총장 조광조.(1482 성종13~1519 중종14) 진사시험 수석합격자로 홍문관 부제학 대사헌 미신타파, 소격서 폐지, 도학정치 주장, 공훈록에서 제거된 일파에 의해 모함을 받아 귀양가서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공자묘에 함께 모셔졌습니다.
감사원장 조식.(1501 연산군7~1578 선조5) 성리학에 통달한 대학자 단성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불응하였고 이황선생의 권유로 상서원 판관을 받았으나 명종을 사정전에서 뵙고 치란의 도리와 학문의 방법을 표(表)로 올리고 재야에 묻혀 학행에 힘썼습니다. 사후 영의정으로 추서되었습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한 대신들의 특징은 한결같이 청렴했고, 목숨을 아끼지 않는 소신이 있었고, 왕보다 백성을 섬기려 했고, 권력을 누리려 하지 않고 언제든지 벼슬자리를 그만둔다는 자기 신념에 강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학문을 이루어 덕을 닦았고, 저술을 남겼으며, 국가 대계를 위해 후학들을 양성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녀들과 가족에게는 냉혹했고 출사(出仕 벼슬길에 나아감)와 치사(致仕 벼슬자리에서 물러남)가 분명한 이성과 지성을 소유한 애국자들이였습니다.

유화웅-시인, 수필가/예닮글로벌학교장

(aknews051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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