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포자기(自暴自棄)란 말의 사전적 풀이는 절망 상태에 빠져서 자신을 버리고 돌보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원래의 뜻은 사전의 풀이와 많이 다릅니다.
이 말은 맹자 이루상(離婁上)에 ‘자포자(自暴者)는 불가여유언야(不可與有言也)요, 자기자(自棄者)는 불가여유위야(不可與有爲也)니’에서 나온 말입니다. 즉, ‘스스로 해치는 자’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 있을 수 없고, ‘스스로 버리는 자’ 함께 진리를 행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이어서 언비예의(言非禮義)를 위지자포야(爲之自暴也)요, 오신불능거인유의(吾身不能居仁由)를, 위지자기야(謂之自棄也)라는 것입니다.
말로써 예의를 비방하는 것이 즉, ‘자포’하는 것이고, 내 몸은 어짐에 거하거나 의를 말미암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을 곧 ‘자기(自棄)’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말을 예의에 벗어나게 하는 것이 ‘자포’이고 옳은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이 ‘자기’라는 것입니다.
언어를 공격의 무기로 상대방을 해치려는 ‘자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히, 정치인은 국가의 안전과 부강을 위해 노력해야 하고 국민의 복지와 행복을 위해 땀을 흘려야 하는데, 정적끼리 서로 온갖 험담, 욕설과 거짓말로 소모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선거철, 홍보물에 화려한 학력과 경력을 과시하며 거인처럼 보였던 사람들이 의원 배지를 달고 부터는 왜소해지고, 저열한 수준의 언어로 언론 플레이하며 개인 SNS를 통해 자극적이고, 공격적이고, 자기 현시적이며, 상대방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도 하고, 옥석을 가리지 못한 말버릇으로 실망주고 있습니다.
현재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역사와 후손이 어떻게 평가할까 하는 가치의식이 전혀 없고 심지어 위선적 행위를 정의의 화신처럼 꾸미고도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격퇴시키거나 사살해야 하는 과녁으로 삼아 현란한 화술로 혀를 놀립니다.
마음의 바탕에는 이기적 자기합리화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고상하고 품위와 격조 있는 화법을 기대하지는 않지만 최소한의 양심과 교양 있는 언어라도 보여주었으면 합니다. 거짓말을 자판기 수준으로 토해내고 있는 이들은 맹자에 기록된 대로 ‘자포’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음으로 자기(自棄)하는 행위입니다.
지도자들로 의(義)의 길을 가야할 사람들이 불의한 길을 가고 있습니다. 대의를 존중해야하고 명예를 소중히 여겨야 하고 높은 자존감을 가져야 할 사람들이 추하고 천박한 모습으로 국민의 눈에 비치고 있습니다. 손발은 주민을 위하여 낮은데로 가야하는데 권력을 탐하는 높은 곳만 찾습니다.
주민이 불편하고 힘들어 하고 어려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수시로 모니터링하고 여론을 수집해서 자기 몸을 희생해야하고 헌신하는 것에서 멀리 가있습니다.
당선이 된 후부터는 조직에 끌려 다니고 상명하복의 조직원으로 당직자에게 눈에 들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봅니다. 지조와 양심과 지성과 이성은 안보이고 굴종과 변심과 배반과 비이성과 반지성이 스펙트럼을 이루어 주민의 눈을 어지럽게 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가야할 길을 가지 못하고 옳지 못한 줄 알면서도 자기 정치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겨 다니고 있습니다. 길 없는 길은 가야하는 고통을 겪는 그들의 모습이 오히려 불쌍하기도 합니다. 권력이 뭐 길래 저렇게 막다른 골목인줄 알면서도 발버둥 못치고 제 목소리도 못내고 끌려 다녀야 하는 정치인의 아포리아(Aporia)를 봅니다.
정적을 사랑하지는 못하더라도 미워하거나 타도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염소가 서로 싸우다 둘 다 강에 떨어져 최후를 맞는, 아니 마주 달려오는 여객 열차가 충돌하여 승객까지 희생당하며 하는 화를 당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맹자 이루에서 말하고 있는 ‘자기(自棄)’는 가지 않아야 할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특히 지도자의 반열에 있는 사람은 ‘자포’하고 ‘자기’라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의 울타리에 갇혀 있는 이들이 있는 한 화해와 용서와 평화와 행복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유화웅-시인, 수필가/예닮학교 교장